본 것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

Foxybead 2020. 9. 2. 13:24


<
머리로만 세상을 살고 싶은 우리들, 겁 많고 상처받은 우리들에게 굿 윌 헌팅이 주는 위로>

 

 

 세상에는 정말 좋은 영화와 책들이 많다. 특히 창작의 문법을 정확히 따른 헐리우드 웰 메이드 영화들은 시나리오의 구성, 영화의 촬영과 편집기법, 배우들의 연기 등 무엇 하나 빠짐없이 감탄이 나오는 교과서적인 작품들이고, 배울 거리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작품들 가운데에서도, 이것만큼은 내 인생 영화에요! 내 인생 책이에요! 라고 선뜻 말할 수 있는 작품을 고르는 건 쉽지 않다. 좋은 작품이 너무 많은 이유도 있지만, 역으로 어떤 작품을 내 인생을 대표할 만큼의 작품으로 삼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 삶이 영화보다, 책보다 치열했다고- 영화에서 소설에서 건너뛰는 치열한 반복과 고난이 내 삶에는 담겨있었다고 위로와 자부를 느낀다.)

 

 아직 내 삶을 대변할 진하고 밀도 있는 영화는 선뜻 고르지 못했지만, 살면서 나 자신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느낄 때, 경박해져간다고 느낄 때, 머리로만 세상을 살아가려고 할 때, 초심을 다짐하면서 떠올리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를 본 것은 당시 느끼기에 지금이 삶에서 가장 척박하고 불안했던 때였다. 그 날, 펑펑 울며 나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과 나 자신에게 상처받은 나에게 사과를 홀로 되뇌었다. 영화는 바로 97년 제작되어 98년 개봉한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이다.

Good Will Hunting Poster

 굿 윌 헌팅은 젊디 젊은 맷 데이먼이 절친인 벤 애플랙과 함께 쓰고, 각기 주연과 조연으로 출연해서 만든 영화다.

Ben Affleck_Matt Damon

영원한 나의 지니(Genie) 로비 윌리엄스가 나오고,

Genie/Robin Williams

(영화를 만든 이들이)삶을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이기에 물을 수 있는 질문들이 나온다.

 

영화는 주인공인 윌이 감당하기 힘든 아픔를 입은 소년이 자신의 재능을 썩히는 것으로, 그러는 동시에 기득권을 진득하게 조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매일 아침, 보스턴 빈민가에 있는 윌의 아침은 친구인 처키가 함께 일하러 나가기 위해 윌을 픽업하러 오는 것에서 시작한다. MIT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둘은 하루의 시작부터 끝을 거의 함께하는 친구들로, 거칠지만 순수하다. 함께 웃고, 떠들고, 싸울 때 서로의 등을 지켜주는 우정을 나눈다.

실제로도 절친, 영화 속 캐릭터도 절친

싸울 때 서로의 등을 든든히 지켜주는 것은 좋지만, 학대 속에서 자라난 윌은 내면의 분노와 공격성을 혼자 감당해내지 못한다. 패거리 싸움으로 이제 자칫하면 정말로 (구치소가 아닌)감옥으로 보내질 판이다.

분노의 구타

 만약 이대로 윌과 척의 일하고, 취하고, 떠들고, 문제를 일으키거나 가까스로 넘어가거나 하다가 집에 돌아가는 일상이 계속 반복된다면 윌의 인생도 윌의 인생 한 면을 본 우리의 인생도 별 달라지는 것 없이 흘러갔을 것이다.

 

어느 날, 수재 중의 수재들이 듣는 MIT 수학과의 필즈 메달 수여 교수인 랭보 교수는 복도에 아주 어려운 수학 문제를 출제한다. 내심 푸는 이가 없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낸 그 문제는 주말이 지나가기 전에 완벽하게 풀려있다

 

문제를 푼 이는... 똑똑이 대학원생들, 학부생들이 아닌 복도 청소하는 애송이! 이 사건을 계기로 윌은 랭보 교수의 관심을 끌고, 평소 같았으면 찾아갈 일이 절대 없었을 시설실에 찾아가 겨우겨우 윌을 찾아낸다.

 

 랭보가 다시 마주한 윌은 폭력 문제로 선 법정에서 변호사 없이 자가 변론을 한다. 윌을 맡은 판사는 윌의 과거 기록을 살펴보며, 우리에게 그가 겪은 학대와 과거의 전과 기록을 읊어준다. 이제서야 관객은 알아차린다. , 얘 상처받은 영혼이구나!

법원에서 자기 변론. 존똑!

 상처받은 영혼은 세상에 잔뜩 경계심을 품고 좀처럼 마음을 열기 어려운 법. 윌의 재능을 귀하게 여긴 랭보는 별별 수단을 다 활용해 랭보를 선도하고자 하지만, 랭보가 기가 막힌 천재라는 것만 매번 확인할 뿐 사회성을 갖춘 인간으로 이끄는 데는 실패한다. 연결시키는 심리상담가들을 매번 머리 꼭대기에서 갖고 노는 윌을 마지막으로 맡긴 사람은 오랜 라이벌이자 이제는 좀 대하기 껄끄러운 옛 룸메이트, 숀 맥과이어다.

sean_lambeau

 내노라는 학자들을 다 내쳐내고 속내를 감췄던 윌이, 숀 앞이라고 갑자기 공손해질 리는 없다. 윌은 이제까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숀이 그린 그림을 분석하며 그의 상처를 찌르고, 대화 속에서 얻은 정보로 숀의 와이프를 꼬투리 잡아 밀쳐내려고 한다. 숀은 이제까지의 학자들과 달리 그저 얼굴이 빨개져 분개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윌을 물리적으로 거칠게 제압하지만, 정기 세션을 수락한다.

윌이 숀의 가슴을 후벼파는 도구로 사용했던, 문제의 그림. 

 그리고 그들의 첫(?) 정기 세션. 숀은 윌을 어린아이라고 말한다. 그가 머릿속에 담은 수많은 지식들, 견해들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진정한 아름다움도, 사랑도, 진정한 상실감도, 선대의 작가들이 삶의 절절한 한가운데에서 숨이 넘어갈 듯 외쳤던 절박한 말을 경험해보지도, 느껴보지도 못한 어린아이일 뿐이라고. 그렇게 타인을 자기 자신보다 사랑해본 적이 없는 윌이 그의 눈에는 (윌이 바라는 것처럼)지적이고 자신감 있는 성인 남자가 아니라, 오만하고 겁 많은 어린아이로 보일 뿐이며, 달랑 한 장의 그림을 가지고 마치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의 모든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한 두 마디 말로 난도질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따끔하게 말한다. 그건 마치 올리버 트위스트한 권을 읽고, 고아였던 윌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이에 처음으로 윌은 아무 말도 못하고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는다.

I doubt  you 've ever dared to love anybody that much. I look at  you  and I don't see an intelligent, confident man: I see a cocky, scared-shitless  kid .

 이 몇 마디 말로 윌의 모든 아픔이 가시고 개도되었는가? 대개의 극적 상황을 거친 인물은 그렇게 변화하고 극은 아름답고 행복하게 마무리되지만, 이 이야기는 이제 겨우 절반을 왔다. 윌은 이제 겨우 마음을 조금 열었을 뿐이다. (실제로 그 다음 세션에서는 상담 시간 내내 둘이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로도 윌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들의 평생의 과업을 너무 쉽게 뒤집고, 특유의 거만함으로 일을 망치고, 사람에게 상처주는 일을 저지른다. 그러나 조금씩삶에 진심을 담는 법을 배워간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좋은 머리나 재능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거나, 세상을 조롱하거나 그럼으로써 아무도 내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뾰족한 가시를 세우는 게 아니라, 넓게 마음을 열고 소통해야 한다는 것을 익혀간다.

 

 이후의 전개는 위 장면의 부연에 다름없다. 윌의 재능을 귀하게 본 랭보 교수는 그를 빨리 요직으로 보내고 싶어하고, 고집과 자아에 똘똘 뭉친 자존심 센 어린아이로 보는 숀은 하나하나 그의 내면을 일깨워가며 어른부터 만드는 걸 먼저라고 여긴다. 윌은 랭보 교수의 인도를 거세게 거부하고, ‘내가 저 화이트 칼라 직업에 들어가서 거드름 피우기 싫어요! 세상 모든 직업은 다 고귀한데 내가 왜 그래요? 나는 목동되는 게 꿈이에요!’라며 숀에게 반항한다.

맘과 다르게 좋아하는 사람 밀어내기...

진짜 사랑하던 여자친구를 떠나보내면서, 그녀 입에서 붙잡아 달라는 말, ‘사랑해를 듣고도 마음 꽉 닫고 움직이지 않고, MIT 연구실 대신 건설현장으로 출근한 윌의 등을 돌려세운 것은, 매일을 함께하던 척이다. 1시간 40분이 넘는 상영시간 동안 나온 척의 대사 중 가장 길고, 가장 묵직하며,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3분 남짓 되는 이 장면에서 척은 로또 복권을 깔고 앉고 태어났으면서도 너무 겁쟁이라 현금으로 바꾸지 못하는윌을 지적하며, 윌이 계속 이렇게 사는 것은 우리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하며, 윌이 이 굴레에서 벗어날 것을 말한다.

멋짐 폭발...

거의 도망칠 뻔했던 윌은 이렇게 다시 되돌아와 치유의 마지막 단계, 학대 받은 과거를 직면하고, 내면의 가장 나약하고 힘들었던 부분을 숀 앞에서 고스란히 내보이며 울음을 터뜨리며 기나긴 트라우마에서 겨우 벗어난다.

It's not your fault

 우리 세대(밀레니얼~Z세대)는 대부분 윌과 닮아 있다. 상처받기 쉬운 자아의 소유자들이면서 내면의 상처를 덮기 위해 온갖 정보와 지식으로 무장하고, 관계 맺기에 취약하며, 세상과 타인에 대해 너무 쉽게- 몇 마디 말과 몇 줄의 글로 판단하고 상처입힌다. 문제는 그렇게 자신을 덮을수록 점점 더 외로워진다는 데 있다. 세상살이에 진심을 담을 때, 상처도 받지만 진심을 얻는다. 상처를 받는 것도, 이겨내는 것도 이 과정을 거쳐야만 이뤄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피한다. 인터넷 익명의 공간으로, 너무 쉽게 폭파하고 다시 생성할 수 있는 계정의 이면으로 숨는다. 사랑받고 싶으면서 사랑받지 못할 말과 행동으로 상대에게 밀쳐 지기 전에 상대를 밀어낸다. 그러면서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굿 윌 헌팅은 이런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리고 우리의 상처와 걱정은 성장통이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모두 나처럼 상처받기 쉬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로봇이 아니고, 이론이 아니다. 사람의 성장은 머리나 재산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얼마나 회피하지 않고 진심 어리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이루어진다.

 

 머리로만 세상을 살고 싶은 우리들, 겁 많고 상처받은 우리들, 영화는 그런 어린 우리들을 위로하고, 어른이 될 수 있다고 격려해준다. 이 메시지를 꼭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